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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8일 목요일

한일군사협정, 26일 국무회의서 슬그머니 비공개 처리

원본게시날짜 :

한일군사협정, 26일 국무회의서 슬그머니 비공개 처리
국민엔 숨긴 정부, 일본엔 당일 통보


정부가 이르면 이번 주말 일본과 첫 군사협정인 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협정안을 26일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킨 사실이 확인됐다. 정부는 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채 슬그머니 처리한 것으로 드러나 정치권과 여론의 반발이 예상된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27일 “일본과의 정보보호협정안이 어제 국무회의를 통과해 체결에 필요한 국내 절차가 거의 마무리 단계”라며 “이르면 29일 한일 외교당국 간 서명이 이뤄질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29일에는 일본 각의가 예정돼 있어 일본의 국내 절차가 완료되는 대로 양국의 서명식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 당국자는 “한일 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되면 일본의 정보역량을 활용하고 동북아지역의 안보를 위한 양국 간 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이 마련된다”며 “한국이 북한의 위협은 물론이고 테러나 자연재해 같은 초국가적 안보문제에 대응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협정은 당초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5월 말 일본을 방문해 서명할 예정이었으나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강력히 반발해 유보됐다. 이후 한 달여 만에 서명 주체가 외교부로 바뀌어 다시 체결이 추진되는 것이다.

정부는 26일 국무회의에 상정된 안건 43건을 취재진에 상세히 브리핑하면서도 이 협정안은 비공개에 부쳤다. 더욱이 정부는 국무회의 처리 사실을 일본에는 당일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보다 일본에 먼저 알려준 셈이다. 이런 처리 과정이 사실상 ‘은폐’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상대국인 일본의 국내 절차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비공개인 ‘대외 주의’ 안건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일본도 아직 필요한 국내 절차를 밟지 않은 사안을 굳이 한국이 먼저 처리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중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담에서 미국이 군사 정보보호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촉구한 뒤 정부가 서둘러 이를 강행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 [채널A 영상] 한일군사협정 비밀리 통과…美 압박 때문?

일본의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외상은 27일 기자회견에서 “(한일 양국이) 비밀정보 보호협정이 있으면 안심하고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만큼 큰 전진이다”라며 반겼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원문 : http://news.donga.com/3/all/20120628/47350235/1




2012년 1월 19일 목요일

일본서 더 잘나가는 '친일파 명단', 참담하다

원본게시날짜 :  12.01.18 14:18 ㅣ최종 업데이트 12.01.18 19:46

[기획] '친일인명사전 편찬, 네티즌의 힘으로' 모금캠페인 8주년 특별기고 ②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친일인명사전, 네티즌의 힘으로' 모금을 통해 지난 2009년 11월 9일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습니다.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 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는 2004년 모금 8주년을 맞아 당시 모금에 참여해주셨던 그날의 '당신'을 찾고자 합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 이와 관련된 기사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 연구소 앞에서 진행된 수구단체의 시위.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지 한 달여 뒤인 2009년 12월 8일.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한국자유연대,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 수구단체 회원 150여 명은 1시간 가량 민족문제연구소 앞에서 '친일인명사전 폐기', '민족문제연구소 해체'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어버이연합
<친일인명사전>의 연원을 이야기하자면 반드시 짚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 둘 있습니다.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친일경찰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던 '반민특위 습격사건'과 바로 20일 뒤에 일어난 '백범 암살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들은 친일세력이 민족주의세력을 국가운영에서 배제하고 일제시기의 기득권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 땅에서 '친일청산'은 더 이상 민족적 과제가 아니라 '빨갱이의 농간'이요 '국론분열 행위'로 간주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친일청산을 외치는 일은 가시밭길을 넘어 목숨을 거는 위험천만한 체제도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임종국 선생은 그때 모든 사회진출이 차단되어 천안에서 밥을 굶듯이 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해방 이후 모든 지식인이 친일파에 대한 연구나 언급을 철저하게 기피하고 있을 때 오직 혼자서 펜을 들었고,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복은 가혹하고 잔혹했습니다. 친일파가 모든 분야에서 득세하는 세상에서 그분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도록 철저하게 사회 진출을 차단 당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분의 비참한 모습은 친일파에게 도전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 케이스이기도 했습니다. 그 공포에 질렸음인지 친일파를 문제 삼는 지식인은 그 후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사지경에 빠진 고난 속에서도 친일파 연구를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범위를 문학에서 벗어나 전 친일파로 넓혀서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조정래, <황홀한 글 감옥> 중에서)

  
▲ 임종국 선생의 친일인명카드. 연구소는 반민특위의 정신과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故)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에 설립되었다. 2만여 장이 넘는 선생의 친일인명카드가 있었기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가능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임종국
2003년 12월 30일, 국회가 <친일인명사전> 관련 기초조사 예산 5억 원을 전액 삭감한 것은 조정래 선생이 말한 또 하나의 '모델 케이스'였습니다.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역사청산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논리는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세상은 이미 변해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깨어 있었고 양심들은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예산 삭감 9일 만에 통쾌한 반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네티즌의 힘으로' 캠페인 첫날인 2004년 1월 8일. 이날은 꼭 55년 전 반민특위가 당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파 청산 작업에 착수한 날이었습니다. 모금 캠페인을 시작한 지 5년 10개월 만인 2009년 11월 8일, 숱한 방해와 위협을 뚫고 마침내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무게 7.42㎏의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 조이며, 애태우고 때론 분노했던가요. 

금서 아닌 금서 <친일인명사전>... 공공도서관 보급률 32%

  
▲ 누가 친일인명사전을 막고 있는가? 반민특위 와해 60년만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이 갖는 역사적 상징성과 교육적 가치를 외면한 일부 학교들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의 학교 도서관 보급에 어려움이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사전을 발간하고 2년이 지난 지금, 사전은 얼마만큼 사회 속에 뿌리내리고 있을까요. 2012년 1월 현재, 약 4700여 질(기증 포함)이 보급되었습니다. 출판계가 불황인 점, 전문서적인 점, 30만 원으로 가격이 높다는 점, 상업 광고를 한 차례도 하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하면 <친일인명사전>은 보급 면에서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는 것이 출판계의 평입니다. 특히 발간 초기 온라인 모임인 '세계아고라정의포럼'과 '대한불교청년회'의 보급운동이 눈에 띕니다.

'세계아고라정의포럼'은 2010년 초 회원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였고, 적게는 3만 원부터 많게는 240만 원을 낸 분들도 있었습니다. 회원들은 이 돈으로 <친일인명사전>을 구입해 노들장애인야학, 지리산고등학교, 설천재가노인복지센터 등 국내 10곳과 한국학연구소가 있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미국 컬럼비아대학 등 7개 외국 대학교에 기증했습니다. 기증된 사전에는 "친일의 역사는 결코 잊거나 방치해서는 안 될 우리가 극복해야 할 유산이기에 이 책을 나눕니다"라는 문구도 새겨 넣었습니다. 대한불교청년회는 1920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만든 조선불교청년회에서 시작한 단체로 2010년 창립 90주년을 맞아 사전 보급 운동을 1년 내내 벌여나갔습니다.

그러나 사전 발간을 염원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이 보기에 사전의 보급은 아직도 더디기만 합니다. 공공도서관의 경우 전국 687개 도서관에 223질 밖에 보급되지 않아 보급률이 32% 선에 그치고 있습니다. 어느 공공도서관 관계자는 왜 사전이 없는지를 묻는 <경향신문> 기자에게 "적은 예산으로 구입하기에는 <친일인명사전>이 너무 고가인 데다 희망도서신청도 없어 구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전이 비싸기 때문에 더더욱 공공도서관이 시민들을 위해 사전을 비치해 놓아야 하는데 이토록 소극적이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도서관 사정에 밝은 전문가의 설명에 따르면, 보통 공공도서관들은 도서관 장서 규모를 키우기 위해 고가의 사전류보다는 1만~2만 원 대의 단행본을 주로 구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민 다수가 지속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면 구매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사전 구입 거부하는 학교들... '친일인명사전'을 허하라

  
▲ 이상진 전 서울교육위원이 "친일인명사전 현황 보고하라"고 지시했던 공문. 이상진 전 교육위원은 전교조를 친북좌파로 몰아붙이고 이적단체로 검찰에 고발까지 한 '반국가교육척결 국민연합' 상임대표로 한국국공사립초중고교장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반전교조 인사로 알려져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사전 보급이 더딘 이유 중에는 일선 초중고 학교의 현실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다음 사례들은 학교 현장에서 사전 보급 자체가 차단되고 있는 사실을 폭로한 <오마이뉴스> 김행수 시민기자의 2010년 9월 9일자 기사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관련 기사: 교장샘, <친일인명사전> 구입하지 말라고요?)

① 서울 강서구 ㄷ고 ㅈ교사는 한일병탄 100년을 맞아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니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4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구입을 신청하였다. 얼마 뒤 도서관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아무리 찾아봐도 <친일인명사전>을 찾을 수가 없어 확인해 보니 교장 선생님이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을 문제 삼아 도서관에 비치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 교장 선생님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따져 물으니 "(친일파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고, 역사적 판단이 서로 달라 아직 분란의 소지가 있어서 학생들이 그런 책을 보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② 사립학교인 종로구 ㅅ고 역사 교사인 ㄱ씨는 2009년 11월 수업 참고용으로 <친일인명사전>을 신청했는데 5개월이 지난 2010년 4월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사서 교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도서선정위원회의 구입 결의가 없어 살 수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③ 2010년 4월 서울교육청은 서울 소재 모든 학교에 <친일인명사전>의 도서관 비치 여부를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대표적인 반전교조 인사로 알려진 당시 교육위원 이상진씨(전 한국 국공사립 초중고 교장협의회장)가 이를 문제 삼으며 현황 파악에 나선 것이다. 각 학교에서는 이 공문을 '<친일인명사전>을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이 책의 구입을 주저하였다. 실제로 ㄷ고의 사서 교사는 <친일인명사전> 구입 여부를 묻는 교사에게 "교육청에서 공문이 왔다"며 "학교가 부담스러워한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결국 이 학교 도서관에는 지금도 <친일인명사전>이 없다.

처음 이 공문의 존재를 제보한 서울 강서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오히려 이 공문을 보고 더욱 친일인명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에 사전 구입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학교 현장에서는 교장 또는 상급 관청의 지시와 감독으로 인해 사전이 비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사립학교들에서는 '우리 학교 설립자와 관련이 있다', '친일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 등의 이유로 친일인명사전 구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교사들의 학사참여가 활발한 것으로 평가되는 광주광역시 초중고 학교의 경우를 봐도, 아직도 <친일인명사전>이 학교 담을 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1년 8월 29일 광주광역시의회 김선호 교육의원은 본회의 5분 발언을 통해 광주시내 일선 학교의 <친일인명사전> 비치 현황을 공개했습니다. 그 결과 시내 147개 초등학교는 단 1곳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중학교는 86개교 중 24개교(27.91%), 고등학교는 66개교 중 28개 학교(42.42%)가 각각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김 의원은 "이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이 그 책 구석구석에 알알이 박혀 있는데도 공공기관은 <친일인명사전> 비치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듯 <친일인명사전>의 국내 보급이 저조한 가운데, 이 사전의 보급을 꺼려할 만한 일본에서는 오히려 판매가 활기를 띤다고 합니다. 국내 도서의 해외 유통을 주로 하는 어느 업체 대표는 일본의 각 대학으로 <친일인명사전>이 꾸준히 나가고 있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제 집에서 구박받는 자식, 집 밖에서 대접받는 형국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이 금서 아닌 금서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나 언젠가는 전국 방방곡곡 모든 도서관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직접 책장을 넘기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사전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 낸 역사가 있으니까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판매 수익금 전부를 시민역사관 건립 기금으로 적립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이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만큼 그 과실을 사회에 환원하자는 취지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이 학문적 기록이라면 시민역사관은 이를 풀어내 생생한 자료로 진실한 역사를 증거할 것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의 공동캠페인 '그날의 당신을 찾습니다'. 2004년 1월,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친일인명사전 편찬, 네티즌의 힘으로'에 참여해주신 시민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사전편찬다큐(DVD) 증정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방학진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원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85131&CMPT_CD=P0000




2012년 1월 12일 목요일

[단독]정부 대표단 이달 訪美… '이란산 원유' 협상

원본게시날짜 :  2012.01.11 14:34


[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정부가 이란산 원유 수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달 중 미국에 대표단을 파견한다. 사실상 이란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는 미국의 국방수권법 적용에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원유 수입량의 9.8%(8260만 배럴·석유공사)를 이란에서 들여왔다. 사우디아라비아(31.4%)·쿠웨이트(12.3%)·카타르(10.0%)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비중이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11일 "사실상 이란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는 미국의 국방수권법 적용에 예외를 요청하기 위해 이달 중 관계부처가 방미 대표단을 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방미 대표단은 재정부와 외교통상부, 지식경제부 등 관계부처 당국자들로 구성된다. 

사태를 관망하며 주변국의 분위기를 살피던 정부가 자세를 바꾼 건 미국과 이란의 대치 상황이 장기화될까 우려해서다. 이란은 세계 최대의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 카드를 꺼냈고, 미국은 군사력 동원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중동 지역의 긴장에 국제유가는 크게 올라 9일 두바이유 현물가격이 110.5달러까지 상승했다. 지난 연말보다 5.4% 높은 값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극단적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으로 보지만, 양국의 대치가 길어지면 외교적인 부담이 커지고, 유가가 올라 특히 물가에 나쁜 영향을 줄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배럴당 최대 5달러 이상 싼 기름을 두고, 비싼 기름을 사야 하는 입장도 난처하지만, 공급측 인상 요인이 크지 않다고 봤던 올해 물가 여건이 달라진 게 더 큰 걱정거리"라고 했다. 

문제는 미국과의 협상이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도 우리도 선뜻 카드를 꺼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미국 입장에선 구체적인 감축량을 정했을 때 한국이 이를 맞추면, 추가 제재에 동참을 요구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로선 이미 이란산 원유 금수 조치에 동참한 EU나 참여를 검토하는 일본 등 다른 우방국의 움직임이 부담스럽다. 장기적으론 이란과의 관계도 살려둬야 한다. 정부는 방미 협상에서 이란산 원유 도입분을 '상당량 줄이겠다'며 성의표시에 나설 계획이지만, 미국이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박연미 기자 change@



원문 :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11108054899364&mod=201201120834




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한나라당과 전두환, 친일파, 강풀26년 좀 빠삭하게 알려주세요 ㅠㅠ

원본게시날짜 : 2011.10.31



한낱 '설'에 의존하는거죠.
음모론 종자들..
뭐 5.18이 폭동이다 라고 주장하는 분들 보시면 의견이 갈립니다.
어떤 분들은 김대중 석방을 요구했으니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어떤 분들은 북한이 개입됐다, 어떤 분들은 폭동인데 김대중이 대법원에 압력을 넣어서 민주화운동으로 판결받았다. 그게 다 근거가 없이 떠도는 '음모론'이니 의견이 갈리는 겁니다.

당시 5.18 대법원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

그냥 간단하게 대법원 판례 본문 출처를 남기고 갑니다. http://glaw.scourt.go.kr/jbsonw/jbsonc08r01.do?docID=35129A9B850E40EAE0438C01398240EA&courtName=&caseNum=96도3376&pageid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우파 중에서도 아주 극우적인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지만원씨. 이미 나라에서 판결이 다 났고,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도 등재된 마당에 한낱 음모론을 내뱉는 사람들 보면 참 한심하죠. 4.19혁명도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죠. 안타까운 현실.....


그리고 한나라당이 친일파라는 주장은 아마 2005년 친일반민족 행위자 관련 특별법에서 한나라당 의원의 대부분이 반대하면서 더 심해진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빼겠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환수에 관한 특별법안2005-12-08 / 제256회 15차 본회의 : 총 299명 중 찬성 155명 불참 6명 출장 4명 청가 12명 결석 122명
찬성
(155명) 열린우리당 : 135명 ( 강기정 강길부 강봉균 강성종 강창일 강혜숙 구논회 권선택 김교흥 김근태 김낙순 김덕규 김동철 김명자 김부겸 김선미 김성곤 김영주 김영춘 김우남 김원웅 김재윤 김재홍 김종률 김진표 김춘진 김태년 김태홍 김한길 김혁규 김현미 김형주 김희선 노영민 노웅래 노현송 문병호 문석호 문학진 문희상 민병두 박기춘 박명광 박병석 박상돈 박영선 박찬석 배기선 백원우 변재일 서갑원 서재관 서혜석 선병렬 송영길 신계륜 신기남 심재덕 안민석 안병엽 안영근 양승조 양형일 염동연 오영식 오제세 우상호 우원식 우윤근 우제창 원혜영 유기홍 유선호 유승희 유시민 유인태 유재건 유필우 윤원호 윤호중 이강래 이경숙 이광재 이광철 이근식 이기우 이목희 이미경 이상경 이상민 이석현 이시종 이영호 이용희 이원영 이은영 이인영 이화영 임종석 임종인 임채정 장경수 장영달 장향숙 전병헌 정덕구 정동채 정봉주 정성호 정세균 정의용 정장선 정청래 제종길 조경태 조배숙 조성래 조성태 조일현 조정식 주승용 지병문 채수찬 최규성 최규식 최성 최용규 최재성 최재천 최철국 한광원 한병도 홍미영 홍재형 홍창선 )
민주노동당 : 9명 ( 강기갑 권영길 노회찬 단병호 심상정 이영순 천영세 최순영 현애자 )
민주당 : 7명 ( 김종인 김효석 손봉숙 신중식 이낙연 이상열 최인기 )
무소속 : 4명 ( 김낙성 김원기 류근찬 정진석 )

불참*
(6명) 열린우리당 : 1명 ( 천정배 )
한나라당 : 1명 ( 이경재 )
민주당 : 3명 ( 이승희 이정일 한화갑 )
무소속 : 1명 ( 이인제 )

출장
(4명) 열린우리당 : 3명 ( 이계안 이호웅 한명숙 )
한나라당 : 1명 ( 엄호성 )

청가
(12명) 열린우리당 : 5명 ( 신학용 우제항 이종걸 이해찬 장복심 )
한나라당 : 5명 ( 신상진 안홍준 이규택 주성영 최병국 )
민주당 : 1명 ( 김홍일 )
무소속 : 1명 ( 정몽준 )

결석
(122명) 한나라당 : 120명 ( 강재섭 고경화 고조흥 고진화 고흥길 공성진 곽성문 권경석 권영세 권오을 권철현 김광원 김기춘 김기현 김덕룡 김명주 김무성 김문수 김병호 김석준 김성조 김애실 김양수 김영덕 김영선 김영숙 김용갑 김재경 김재원 김정권 김정부 김정훈 김충환 김태환 김학송 김형오 김희정 나경원 남경필 맹형규 문희 박계동 박근혜 박성범 박세환 박순자 박승환 박재완 박종근 박진 박찬숙 박형준 박희태 배일도 서병수 서상기 송영선 심재엽 심재철 안경률 안명옥 안상수 안택수 원희룡 유기준 유승민 유정복 윤건영 윤두환 이강두 이계경 이계진 이군현 이명규 이방호 이병석 이상득 이상배 이성구 이성권 이윤성 이인기 이재오 이재웅 이재창 이종구 이주호 이진구 이한구 이해봉 이혜훈 임인배 임태희 임해규 장윤석 전여옥 전재희 정갑윤 정두언 정문헌 정병국 정의화 정종복 정진섭 정형근 정화원 정희수 주호영 진수희 진영 최경환 최구식 최연희 한선교 허천 허태열 홍문표 홍준표 황우여 황진하 )
자유민주연합 : 1명 ( 김학원 )
무소속 : 1명 ( 신국환 )




원문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402&docId=139385336&qb=7KCV7J2Y7ZmUIOq1sOuMgA==&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1

2011년 11월 9일 수요일

‘친일파의 꿈’, 이명박정부 시대에 이뤘다

원본게시날짜 : 2011-11-09  10:20:34


[뉴스분석] 중학교 교과서 ‘친일파청산’ 문구 삭제…독재정권 표현도 빠져


“친일파 청산 관련 내용은 교과서에서 다뤄도 되고 다루지 않아도 된다.…교과서에서까지 다룰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봤다.”


뉴라이트 계열의 ‘한국현대사학회’ 이명희 교과서위원장은 중학교역사교과서 집필기준과 관련해 이렇게 밝혔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가 다수 역사학자의 우려를 외면한 채 ‘뉴라이트’ 사관을 새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담는 결정을 내렸다.

한겨레는 11월 8일자 3면 <‘친일파 청산’ 문구까지 삭제…역사교육 퇴행한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무슨 얘기일까. 새로운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에서 ‘대한민국은 (유엔에서 합법정부로 승인된)이후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친일파 청산에 노력하였음을 서술한다’는 내용을 삭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연합뉴스



중학교 학생들은 역사교과서에서 독립운동과 친일파 문제에 대해 어떤 교육을 받게 될지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제 식민지 과정에서 민족을 지배하고 수탈한 이들을 도왔던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에도 역사의 단죄를 받기는커녕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했다. 결국 친일파 노릇을 했던 사람은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살고 독립운동가 가족들은 어려움 속에 힘겹게 살고 있다는 자조 섞인 평가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부유하게 살고, 출세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생활했다. ‘친일인명사전’ 출판 등 당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자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숨죽였고,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조용히(?) 항변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뉴라이트’ 사회 전반을 쥐락펴락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이번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서 ‘친일파 청산’ 문구가 삭제된 것은 숨죽이며 살았던 친일파들의 꿈이 이뤄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겨레 11월 9일자 3면.




식민지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뉴라이트 사관을 대한민국의 자라나는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시대가 현실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행위는 무엇이며, 친일파들의 행동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어렵고 힘들게 살았지만 긍지를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후손들 입장에서는 참담한 상황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명박 정부 시대에 벌어진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은 독도문제와 관련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문제점을 지적해왔지만, 비슷한 일이 국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한겨레는 <'역사 농단'과 정권의 운명>이라는 사설에서 “친일파 청산의 의지와 과정, 결과에 대한 기술을 집필기준에서 없앴다. 역대 독재정권과 그 부역자들은 대부분 그 뿌리를 친일파에 내리고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마 가장 큰 수혜자는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인 박근혜 의원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11월 9일자 4면.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독재정권’이라는 문구가 빠졌다. ‘이승만 독재’ ‘박정희 중심 5.16 군사정변’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라는 문구도 빠졌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등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갔음을 서술한다”는 2007년 역사교과서 집필기준도 이번에는 빠졌다.

 

친일파와 독재를 감추고, 민주화운동의 역사도 감추는 이러한 시도성공한 것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역사를 손질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이 문제의 지점이다. 한국일보는 11월 8일자 3면에 <학교 “교과부 의견수렴 시늉만…뉴라이트 역사관 밀어붙이기”>라는 기사를 실었다.


경향신문 11월 9일자 사설.

이명박 정부는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해 2008년 2월 탄생한 정부이다. 국민은 5년의 임기 동안 국민을 대표해서 나라를 책임져 달라는 권한을 위임했을 뿐,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라는 권한을 준 것은 아니다. 역사를 권력의 입맛에 따라 바꾸는 것은 조선시대 ‘왕’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행동인데 이명박 정부에서 그 시도를 하는 것은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경향신문은 <개악된 역사교과서는 다시 바뀔 수밖에 없다>라는 사설에서 “정상적 절차도 안 거치고 학문적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집필기준이라면 역사교과서의 왜곡은 불가피하다”면서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 부르지 못하고, 독재를 독재라고 가르치지 못하는 역사 수업으로 어떻게 대한민국의 빛나는 성취를 교육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지적했다.







원문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49

사진보존용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日 정부 "위안부 문제, 완전 해결"‥공식 거부

2011/10/12





◀ANC▶

위안부문제를 해결하자는 우리 정부의 요구를 일본이 공식 거부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다 끝난 얘기라는 입장을 되풀이했는데, 일본 내에서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도쿄 임영서 특파원입니다.

◀VCR▶

후지무라 오사무 일본 관방장관은 어제 정례회견에서 위안부 청구권 문제는 이미 완전히 해결된 사안이라고 밝혔습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지불한 배상금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포괄적인 배상이 끝났기 때문에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INT▶ 후지무라 오사무/일본 관방장관
"한일국교 정상화로 완전히 해결되고 최종적으로 끝난 문제입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이 나서 위안부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고 밝힌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달 우리 정부가 요구한 위안부 청구권 협의를 거부함과 동시에, 향후에도 협의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겁니다.

당장 일본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1965년 당시엔 위안부의 실상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던 상황으로 드러나지도 않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겠느냐는 반응입니다.

◀SYN▶
"1993년에서야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인정했는데, 1965년에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 정부는 어젯밤 유엔에서 위안부 문제는 전쟁범죄임을 설명한 것을 비롯해, 국제적으로 공론화해 나갈 방침입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독선적 해석이 또다시 파문을 낳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MBC뉴스 임영서입니다.










원문 :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942637_5782.html

2011년 9월 24일 토요일

나경원에 ‘자위대 행사 참석 말라’ 공문 보냈다

등록 : 20110923 15:35



가시지 않는 자위대 행사 참석 ‘거짓 해명’ 논란
정대협 “당과 의원실에 수차례 보내…나의원 해명 말 안돼”


»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
“저희가 자위대 행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팩스도 보냈어요. 그런데 자위대 행사인 줄 몰랐다?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요.”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나경원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2004년 ‘자위대 창설 50주년 기념행사’에 잘 모르고 참석했다고 해명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윤 대표는 23일 <한겨레>와 한 전화 통화에서 “우리가 각 정당과 의원실에 의원들의 참석을 막아달라고 공문울 수차례 보냈다. 보통 국회의원실에는 혹시 못받았다고 할까봐 다섯번 정도 보낸다. 나 의원이 그래도 이를 못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해명은 말도 안된다”고 비판했다.

윤 대표와 나 의원의 해명을 종합하면, 나 의원은 자위대 행사임을 알 수 있었던 여러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잘 모르고 참석한 것이 된다. 한나라당이 나 의원에게 아무 얘기를 안해줬거나, 나 의원실의 보좌관이 팩스를 무시했거나, 당시 행사장 앞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시민단체의 반대 시위도 못봤다는 것이다.

윤 대표는 “나 의원이 거짓 해명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자위대 창설 50주년 행사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나 일제시대 때 한국 여성들이 겪었던 아픔, 이런 것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그걸 몰라서는 안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당시에 자위대 행사에 참석 예정인 국회의원을 5명으로 파악했는데 나경원 의원과 송영선 의원, 안명옥 전 의원 등이었다고 소개했다. 이 중 나 의원과 송 의원은 실제 자위대 기념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윤 대표는 지난 해 나 의원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50만 국민 서명’에 함께 했다고 알렸다. 윤 대표는 “비록 어렵게 어렵게 받은 서명이었지만 나 의원은 서명을 했다”며 “초선 의원 때에 비해 지금은 위안부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나 의원은 더 이상 이와 관련한 해명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나 의원실 관계자는 “우리가 아무리 해명해도 언론은 제대로 실어주지 않는다”며 “이 문제는 더 이상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나 의원이 어느 정도까지 인식하고 자위대 기념행사에 참석했는지는 계속 의문으로 남게 됐다.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자위대 행사는 일본대사관이 주최하는 행사로 아무나 초청하지 않습니다. 또한 국회의원급이면 의전관계로 사전에 참석여부를 여러번 확인하게 됩니다”라며 “그래도 나의원이 ‘몰랐다’면 ‘나는 바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고 거듭 나 의원의 해명을 비판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원문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97640.html









2011년 9월 16일 금요일

프랑스의 과거 청산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 다시 민족반역자는 안나올 것이다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08/26 [19:16]




▲ 드골   ⓒ 역사복원신문
▲   동아일보의 친일 언론 보국 서약  © 역사복원신문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우익이라고 부르는 세력은 전혀 우익이 아니다. 일본의 우익, 나치의 우익, 프랑스나 영국의 우익, 러시아 우익 등과 같이 '우익'이란 민족주의자들을 말하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자칭 우익들은 반대로 민족의 적인 일제에 협조하고 기생해온 자들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우익 정치인으로는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 등을 예로 들 수 있고, 이 분들은 우리나라의 자칭 우익들인 친일파 계열에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그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한국은 항일 투쟁에 거의 아무런 전적이 없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고, 초기 정부 요직은 한민당이라는 친일파 집단이 장악했다. 친일 세력은 처벌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체포조차 되지 않았다.

해방 후 몇 년간 약 2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좌익이라는 명목으로 친일 세력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친일 세력의 척결을 주도적으로 요구하던 집단이었다.

해방 후부터 그들은 우습게도 스스로를 '우익'이라고 불렀는데, 아마 자신들이 무차별로 학살한 자들에게 덮어씌운 유일한 죄목이 '좌익'이었으므로 스스로를 '우익'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여긴 것 같다. 그들이 진짜 우익이었다면 드골과 같이 친일파들을 죽여야 하지만, 그 친일파들이 자기 자신이었기에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이다.

한 가지 일본이 부러운 까닭은 일본 정치인 대부분이 짝퉁이 아닌 진짜 우익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일본이 자신들의 죄를 덮고 여전히 대동아 공영권을 상상하며 독도를 빼앗으려 호시탐탐 노리는 것도 그들 정치인들이 대부분 우익이기 때문이다. (우익이란 이들과 같이 국가주의, 민족주의자들을 말한다) 
▲   나치에 협력했던 여성이 머리가 깎여서 끌려가는 장면  ⓒ 역사복원신문

* 프랑스의 친나치 청산과 언론 숙청 *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게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레 레트르 프랑세즈(주간지 프랑스문학))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에게는 벌을 줘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드골)

나치 협력 민족반역자에 대한 재판은 특히 파리재판소가 거물급 유명 인사들을 거의 다루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이 파리에 집중됐다. 드골의 과거청산 작업은 히틀러가 항복하기 전에 이미 시작됐기 때문에 나치전범을 심판한 뉘른베르그의 국제재판보다 시기적으로 2년 정도 앞서 열렸다.

드골이 주도하는 나치 협력 반역자 대숙청은 민족을 배반한 무리들을 모두 지배세력에서 뿌리뽑았고 악질적이며 광적인 나치협력자들을 사형과 무기강제노동형에 처함으로써 다시는 지배세력으로 군림할 수 없도록 영원히 매장해 버리는 데 성공한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파리의 숙청 재판정에 가장 먼저 끌려나온 피고들은 널리 알려진 나치 협력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전쟁 전에 친 독일 언론인으로 낙인찍힌 부류들이고 파시즘을 찬양하며 나치즘을 확고한 자기신념으로 갖고 나치가 승승장구할 때 자연스럽게 선전역할을 담당해 미친 듯이 설친 자들이다.

그런데 전쟁 전에 기회주의적으로 반 나치였다가 독일이 점령군이라는 강자로 등장하자 나치독일의 선전원으로 전락한 ‘매춘 언론인’은 매우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     © 역사복원신문
드골이 언론인을 제일 먼저 민족반역자의 숙청 재판의 도마 위에 올린 것도 숙청 전략의 일환이었다. 드골 자신이 언론인을 제일 먼저 심판하는 이유에 대해 나중에 솔직히 술회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했다.”고 기록했다.
부역죄는 모든 숙청 재판에 반드시 병과되었는데, 부역죄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및 공직 진출권이 박탈되며, 공무원, 군, 변호사,회계사, 교원, 노동조합원, 언론인과 모든 통신과 정보 업무에서 추방되고 심지어는 개인기업의 사장은 물론이고 이사진에서도 제외된다. 특히 부역죄는 국적 박탈의 형벌이 자동적으로 병과된다고 규정해 드골이 나치 협력 반역자 숙청을 통해 프랑스 사회를 완전히 정화해 애국 시민만으로 재조직하려한 정치적 비전을 실현하려 한 것으로 주목되는 대목이다.

대숙청 후 프랑스 사회가 급속도로 민주화되고 도덕성과 윤리 및 민주적 법질서가 잡힌 것은 나치 협력 민족반역자들을 채로 모두 걸러내듯 부역자들까지도 응징한 것의 결과라는 평가이다.

드골은 파리 해방 직후 파리 숙청재판소에서 나치 협력 언론인을 제일 먼저 민족반역자의 심판대에 올림으로써 반역자 대숙청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간단하게 잠재웠다.
프랑스 대숙청을 처음 학문적으로 연구한 로베르 아롱은 44~45년 나치협력 혐의로 의심받거나 처벌된 사람이 50만명, 구속된 사람이 15만명, 사망자는 3만~4만명이라고 추산했다. 그 가족들까지 감안하면 200만~300만명, 즉 총인구의 3~5%가 나치협력의 죄값으로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주섭일, ‘프랑스의 대숙청’에서)

프랑스 해방 후, 친나치파 및 친나치 언론사의 사형 등에 앞장선 최초의 프랑스 총리는 대표적 우익이었던 드골이었다.

그는 해방 하자마자 나치에 협조한 100만명 정도를 체포했다. 그 중 7천명 정도를 사형시키고, 3만명 정도에게 유,무기 징역을 내렸다. 아마 이 땅이 프랑스였다면 친일 언론 사주 및 사학 집단들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하였음이 분명하다. 특히,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사는 그 재산을 몰수했고, 사주와 경영진은 사형 등의 법적 처벌을 받았다. 언론계의 나치 협조야 말로 가장 혐오스러운 짓이었다고 본 것이다.

드골은 친나치파들을 처단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 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프랑스 초기 정부의 요직을 레지스탕스 요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기사입력: 2011/08/26 [19:16]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원문 :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560&section=sc1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MB는 뼛속까지 친미·친일"... 치욕스럽다

11.09.14 16:04 ㅣ최종 업데이트 11.09.14 16:38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14]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춘원과 그 아류들



근 한 주일째 제 머릿속에 뱅뱅 돌면서 좀체 사라지지 않는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던지고 있는 내부고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문건 가운데 하나인데요. 구체적으로는 지난 2008년 5월 29일치 주한 미국대사관의 외교 전문(電文)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지난 9월 7일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08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당시 국회부의장)은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대화중에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원문은 Vice Speaker Lee said that President Lee was pro-U.S. and pro-Japan to the core so there should be no questioning President Lee's vision.)

이명박 대통령의 '친미·친일' 성향에 대해서는 그간 몇 차례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출생지(일본 오사카)와 <요미우리신문>에 실려 논란이 됐던 독도 관련 발언 등이 '친일' 관련이라면 '친미'는 이보다 한 단계 위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미국 외교관들이 이 대통령을 두고 "우리(미국)와 함께 헌신적으로 일하는 강한 친미주의자"(2009년 9월24일치), "사실상 모든 주요 문제에 미국을 지원하는 성향"(2009년 11월 5일치)을 지녔다고 평가했겠습니까? 

며칠째 제 입안에서 뱅뱅 돌며 저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이상득 의원이 버시바우 대사에게 했다는 말 가운데 '뼛속까지'라고 한 단어였습니다. 천추에 사무친 원한도 아닌데 '뼛속까지'라니! 혹 번역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원문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to the core'로 나와 있더군요. 인터넷 사전에 이를 검색해보니 '속속들이' 혹은 '철저히'로 나와 있었는데, 이 정도라면 '뼛속까지'로 번역해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8년 4월 21일 일왕을 만나 깍듯하게 인사하는 장면이 포착된 뉴스 화면
ⓒ 유투브 동영상 갈무리
친일인명사전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상득 의원은 '일개 한나라당 의원'이 아닙니다. 이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이자 발언 당시 그는 국회부의장이었으며, 대화 상대자는 주한 미국대사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대통령의 성향이나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 대통령과 관련한 이 의원의 발언은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하며 또 주한미국 대사가 거짓말을 본국에 보고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말에서 '뼛속까지'라는 표현은 흔히 골수에 박힐 정도로 심신에 깊이 각인된 상태를 일컫습니다. 즉, 목숨을 걸고 갚아야 할 만큼 깊게 사무친 원한이나 혹은 특정 이념이나 사상으로 무장된 '주의자(主義者)'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제 경험으로 봐온 역사인물 가운데는 골수 친일파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더러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한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친일파 제1호' 김인승

'운양호 사건'이 발생한 지 6개월 뒤인 1876년 2월 4일. 강화도 초지진 앞 바다에 일본 군함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월 6일 일본 시나가와만을 출발해 부산을 거쳐 이곳에 도착한 이 군함에는 구로다 일행이 타고 있었습니다. 구로다는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강제로 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온 일본정부의 특사였습니다. 구로다 일행이 타고 온 군함에는 일본인 복장을 한 조선인이 한 명 끼여 있었는데 그는 김인승(金麟昇)으로 명분상으로는 구로다 일행의 '통역'이었습니다.

친일파연구가 임종국은 이 김인승을 '친일파 제1호'로 지목한 바 있는데, 그는 구한말 조선의 관리 출신이었습니다. 모종의 사건으로 조선을 떠나 러시아 니콜리스크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조선인 유민들의 자제를 가르치다가 일본인 첩자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의 앞잡이가 된 자였습니다.

김인승은 일본 외무성에 외국인 고문(顧問)으로 채용돼 '조선전도'를 그려 바치는 등 일제의 조선 염탐에 적극 협력하였는데, 그가 일본정부에 결정인 기여를 한 것은 구로다 일행을 도와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 협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약 체결을 위해 조선행을 앞두고 구로다가 김인승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번 수행에서도 만약 머리를 깎지 않고 의복을 바꾸지 않으면 이는 제가 조선인을 자처하는 일이며, 일본인의 입장에서 처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황국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어찌 고사하겠습니까?"

김인승은 '일본인의 입장'에 처하기 위해, 즉 일본인이 되기 위해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나서서 따르겠다고 구로다에게 맹세하였습니다. 그 무렵 김인승은 이미 골수 친일파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대로 김인승은 구로다의 통역 신분으로 동행하였고, 구로다가 조선측과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군함에 머물면서 배후에서 '강화도조약' 체결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 그는 용도폐기 돼 러시아로 되돌아가면서 편지 한 통을 남겼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거리에서 듣기 불편한 말들이 들리고 길을 걸으면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역사 속에서 '친일파 제1호'라는 오명을 얻은 그가 배족(背族)의 대가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것은 멸시와 증오뿐이었습니다.

'창씨개명' 앞장선 친일파 춘원 이광수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제는 중일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조달 기지로 조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일제는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 주도자는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였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다음달인 그해 8월부터 미나미는 '내선일체'라는 미명 하에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봉창, 동방요배 등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후 10월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했으며, 12월에는 각급 학교에 일황의 사진을 배포해 경배케 하였습니다. 이듬해 1월 육군특별지원령 공포를 시작으로 5월에는 조선 전역에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했으며, 6월에는 근로보국대 조직을, 7월에는 전국 규모의 전시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창립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그해 4월에는 조선어 사용금지를 골자로 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는데, 그간의  모든 작업은 결국 '창씨개명'을 추진하기 위한 사전 기초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씨개명 작업은 단순히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차원을 넘어 종국적으로는 징병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총독부는 일본군 가운데 이아무개, 김아무개 등의 조선인 이름으로 불리는 병사가 섞여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 창씨개명 '나팔수' 춘원 이광수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1939. 12. 12)
ⓒ 자료사진
이광수 창씨개명


그러나 창씨개명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은 예상보다 컸습니다.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하였는데, 3월까지는 1.07%, 5월20일에 이르러서도 7.6%에 그쳤습니다. 결국 총독부는 관변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밀어붙이는 한편 친일파들을 앞세워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습니다.
이때 가장 전면에서 창씨개명을 홍보한 친일인사는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한 춘원 이광수(李光洙)였습니다. 그는 창씨개명 시행 그 다음날로 창씨계(屆)를 접수하고는 신문에 이를 권유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지나인(중국인)과 혼동될 성명을 가지는 것보다 일본인과 혼동될 씨명을 가지는 것이 보다 자연스런 것이라고 믿는다.(<매일신보> 1940.2.20) …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매일신보> 1940.9.4.)"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통해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며 일제가 바랐던 그 이상의 강도로 친일화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심지어 그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춘원을 두고 어떤 이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 심저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더 놀랍습니다.

'조선어 전폐론'을 주장한 친일파 현영섭

민족을 규정하는 3대 요인으로 흔히 말과 글, 역사를 듭니다. 즉 이 셋을 가진 민족이라야 제대로 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총독부는 일제말기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또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우리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일제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이를 추진했으며 이는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총독부 관료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헌(玄櫶)의 아들로 나중에 친일파가 된 현영섭(玄永燮, 창씨명 天野道夫)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젊어서 사회주의에 빠져 있던 그는 일본 체류 당시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잠시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로선 중대 시국사범인 그는 얼마 뒤 무죄로 풀려나서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돌연 극렬 친일파로 변신했습니다. 그 무렵 그가 주장한 것은 놀랍게도 '조선어 전폐론'이었습니다. 그는 일어로 쓴 자신의 저서 <新生 朝鮮の出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조선어를 존속하도록 허용하는 한 조선인적인 사상경향도 존속한다. 우선 조선어를 폐지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어를 폐지하라. 일본어로 사물을 생각하도록 노력을 시키라. 조선인은 조선어를 망각해야 한다. 조선인이 일본어로 사물을 생각할 때야말로 조선인이 가장 행복해졌을 때이다.…  조선인이 정말로 일본인이 되려 한다면 우선 조선어부터 망각해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현영섭의 저서
ⓒ 자료사진
현영섭 조선어 전폐론



총독부 관료나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이 주장하는 '조선어 전폐론'이라니. 그는 '조선적인' 것에 애착을 갖는 민족주의자들을 페스트에 비유하며 "자살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독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그는 조선총독부로 미나미 총독을 찾아가 조선어를 폐지해달라고 애걸복걸하기도 했습니다.

미나미로서는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었을 텐데 미나미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뜻밖에도 미나미는 '반대'였습니다. 현영섭의 요청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줄 알았으나 미나미는 뜻밖에도 '조선어 전폐 불가론'을 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일어 상용(常用)을 강요해 민심이 좋지 않았는데 여기에 만약 조선어 전폐까지 들고 나올 경우 그 뒷감당이 우려됐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나미는 '담화'를 통해 조선어 전폐 불가론을 정식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아부하러 갔던 현영섭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조차 현영섭을 두고 "눈을 가리고 싶어진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해방 후 신변에 위협을 느꼈던지 그는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줄행랑치고 말았습니다. 

김인승은 일본인이 되기 위해 '끓는 물, 타는 불 속'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춘원은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고 역설하고는 그런 연후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예언하였습니다. 현영섭은 조선총독도 부담스러워 하는 '조선어 전폐론'을 외치며 온몸으로 골수 친일파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뼛속까지 친일파'라고 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일'이라고 합니다. 실지로 이 대통령의 성향이 그러한지, 만약 그렇다면 그 정도는 또 어떠한지 저로선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주권국가의 대통령이 이런 사안으로 입에 오르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대통령 개인은 물론 국가로도 큰 치욕을 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제라도 과거의 언행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원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6204&CMPT_CD=P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