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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3일 수요일

언론은 오늘도 ‘노무현 난도질’ 즐긴다

원본게시날짜 :  입력 : 2012-05-23  09:55:42   노출 : 2012.05.23  10:06:20


서거 3년, 끝나지 않는 무책임 보도… 반성은커녕 ‘인격살인’ 돌림노래
류정민 기자 | dongack@mediatoday.co.kr



3년이 흘렀다. 2009년 5월 23일 그날 말이다. 당시 토요일 오전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시민들은 ‘언론 속보’에 망치로 머리를 맞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전임 대통령이 퇴임 1년여 만에 고향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잃었다. 정치검찰 표적수사 논란이 한창인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언론은 ‘노무현 사망’이라는 속보를 내보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대통령 출신 인사의 죽음이기에 언론은 ‘서거’라는 표현을 써야 마땅한데 일반인이 죽었을 때나 제목으로 뽑는 ‘사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언론의 눈에 비친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위상을 보여준다. 당시 언론은 양손에 쥔 칼날로 ‘죽은 권력(전직 대통령)’의 몸과 마음을 마음껏 난도질했다. 3년이 흘렀다고 그들은 달라졌을까. 정말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을까. / 편집자 주
“노건평 자금관리인 계좌에 300억(조선일보)” “노건평 측근 계좌서 200억 뭉칫돈 발견(중앙일보)” “노건평 관련 계좌서 수백억 발견(한국일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행사를 앞둔 마지막 주말인 5월 19일자(토요일) 주요 전국단위 종합일간지 1면에 실린 머리기사 제목이다. 검찰(창원지검) 쪽에서 나온 내용이다. 노 전 대통령 형님인 건평씨가 거액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게 하는 보도인 셈이다.
노무현재단이 노 전 대통령 서거 3주기를 앞두고 지난 19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토크와 음악, 영상이 어우러진 추모문화제 ‘오버 더 레인보우’를 개최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의 3주기 ‘탈상’을 앞두고 추모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던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봤다. 그러나 사건 전개를 살펴보면 어디에서 많이 본 그림이다. 검찰이 흘리고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노 전 대통령 쪽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히는 장면, 2009년 ‘참혹한 봄’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아닌가. 충격적인 내용의 보도와는 달리 결정적 허점도 엿보인다.
민주통합당 박용진 대변인은 5월 20일 논평에서 “검찰은 ‘노건평 씨 300억 차명계좌 의혹’이라는 어마어마한 휘발성 발언을 해놓고서는 정작 그와 관련한 영장도 청구하지 않고, 수사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돈인지조차 특정하지 않았다. 다만, 노건평씨의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이번 의혹 제기를 통한 모든 정치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조선일보는 ‘300억’이라고 했고, 중앙일보는 ‘200억’이라고 보도했다. 100억 원은 적은 액수가 아닌데 어떻게 그런 오차가 발생했을까. 이런 보도를 접할 때 독자들이 견지해야 할 관점은 ‘팩트’는 맞는지, 언론플레이 효과 등 정치 노림수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봐야 한다는 점이다. 검찰은 너무나 민감한 시기에 엄청난 주장을 흘렸고, 언론은 이를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도했는데 만약 ‘팩트’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그것이 의문으로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공격의 수위를 높이던 언론, 특히 보수언론의 기류 변화가 주목할 부분이다. 조선일보는 5월 21일자(월요일) <노건평 사건, 대통령 가족 부패 이대로 두면 나라 망해>라는 사설에서 “노무현 정권이 막을 내린 지 4년 3개월이 지났는데도 건평씨의 뇌물 드라마는 질기게도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이미 ‘뇌물 드라마’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검찰과 언론의 ‘위험천만한 공조’는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동아일보는 5월 22일자 8면에 <‘노건평 주변 뭉칫돈’ 한발 빼는 검찰>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류가 변한 셈이다. 한국일보는 이날 1면 <“뭉칫돈 노건평씨와 연관 없다” 검찰, 황당한 말 바꾸기>라는 기사에서 “검찰이 뭉칫돈의 정확한 규모와 사용처, 조성 경위, 관련자 조사 등도 거치지 않은 채 서둘러 공개한 사실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중요한 ‘팩트’가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준명 창원지검 차장검사는 21일 브리핑에서 “건평씨 수사 과정에서 문제의 계좌를 발견한 것은 맞지만 이 돈을 건평씨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언론이 노건평씨 자금관리인으로 지목한 폐기물업체 박아무개 대표는 “내가 노건평씨 자금관리인이면 목을 베도 좋다”면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22일 “검찰에서 또 헛발질을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3주기를 앞두고 노건평 선생에 대한 터무니없는 수사를 하다가 이제 발을 빼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검찰이 ‘노무현 죽이기’를 또 계속하는 것인가 참으로 안타깝다”고 비판했다.
언론은 사안의 민감성과 신중함의 필요성을 몰라서 아니면 말고식 ‘여론몰이’에 힘을 싣고 있는 것일까. 언론이 ABC를 모르고 대서특필을 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니면 말고식 보도의 정치적 효과를 내다본 포석일 가능성이 있다.
언론이 보도한 ‘노건평 주변 뭉칫돈’ 의혹이 설사 사실이 아니라 해도 노무현 서거 3주기 추모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데는 이미 성공했다. 자금관리인으로 지목된 당사자는 “목을 베도 좋다”면서 목숨까지 걸었지만, ‘인격살인’의 주체들은 사실이 아니면 어떤 책임을 질지 말이 없다. 그저 아니면 말고의 모습이다.
이번 보도를 심각하게 바라 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노건평 주변 뭉칫돈’ 의혹은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노무현 차명계좌 발언’과 맞물려 의혹 부풀리기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조현오 경찰청장이 한 얘기가 이것 때문이었군”이라는 여론이 형성된다면 그런 의혹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노무현 부관참시’ 효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009년 노 전 대통령 수사를 담당한 검사는 “노무현 차명계좌 주장은 사실 무근”이라고 언론에 여러 차례 설명했다. 그러나 국민은 언론이 보도한 내용 하나 하나를 다 기억해서 사안에 대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이 담긴 보도는 뇌리에 또렷하게 남기 마련이며, 그러한 ‘단상’이 결국 사안에 대한 판단을 이끌게 된다. 언론이 한 번 ‘부패 혐의’를 덧씌우면 당사자는 아무리 억울해도 부정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얘기다.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검찰의 ‘언론플레이’와 일부 언론의 받아쓰기 보도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일이 있다. 그러나 ‘노무현 인격살인’을 즐겼던 그들이 변하지 않았음은 여러 사례에서 드러나고 있다.
검찰과 언론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던 2009년 바로 그해, 노무현재단 초대 이사장이었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상대로 ‘인격살인 공조’를 이어갔다. 한명숙 전 총리를 향해 부패혐의자로 낙인찍는 보도를 쏟아냈지만,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두 번이나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한명숙 전 총리는 “저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삶을 걸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아니면 말고식 언론보도는 ‘인격살인’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뒤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됐다.
‘노무현 인격살인’ 보도의 패턴은 유사하다. 엄청난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고 충분한 정치적 효과(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부정적 인식 주입)를 본 뒤 ‘팩트’ 문제는 뒷전에 놓는 방식이다. 팩트가 틀린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인격살인 가해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2009년 ‘참혹한 봄’, 핏빛 칼춤을 줬던 그 언론들은 반성은커녕 지금도 ‘노무현 난도질’을 즐기고 있다. 



원문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