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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8일 월요일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원본게시날짜 :  기사입력  2012-09-18 오전 10:05:36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71>박정희, 이젠 평가해야 할 때


법정은 일순 숨소리 하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2006년 12월23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 문용선 재판장은 그 침묵을 깨고, 31년8개월여 전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죄 없는데도 목숨을 빼앗긴 8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기 시작했다.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을 선고합니다. 원심을 파기합니다. 피고 각 무죄!"

거의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참고 또 참아왔던 진하디 진한 흐느낌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금세 통곡이 되어 법정을 휘감았다. 민주화된 세상이라 예상되던 재심 판결이었으나, 막상 판사의 육성으로 듣는 "무죄" 소리가 유족들은 기막히게 서러웠다. 31년 전에 그렇게 들었어야 할 선고였다. 그날 그 법정에서는 유족이 아니었어도 다들 울었다.

이 판결은 검찰이 법정항소 시한인 1개월을 넘기면서, 상급심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2007년 1월23일 최종 판결로 확정되었다. 몹쓸 세월에 대통령 한 사람 잘못 만나 죄도 없이 목숨을 잃었으나, 세상이 정상적으로 굴러 가기만 했다면 당연히 벌써 와야 할 그런 날이었다.

그 1년 8개월 뒤인 2008년 9월26일 이용훈 대법원장은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사법부의 과거사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렸다"며 "민족일보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사건 등에 대해 과오를 사과 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사건은 사법부의 잘못이라고 못 박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판결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그런데도 이날 공식 사과문에서 "미래를 향해 새로 출발하려면 먼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와 자기 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새누리당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대법원장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구체적으로 거론해 사과하면서 그랬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가 직접 관련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놓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미래'를 말하면서도 선문답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이끌겠다면서도 사과 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관련자들이 범했다는 죄목은 사형선고가 가능한 긴급조치 4호 위반과 내란 선동 등이다. 훗날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의 후신)의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이 사건이 "유신체제에 대한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자 조작한 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 진실위는 특히 "당시 권력의 정당성이 없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했다"고 진상 조사결과를 밝혔다.

뒷날 줄줄이 위헌판결을 받은 그 긴급조치들은 사실 박정희 씨 개인이, 방해 받지 않고 대통령 오래하려고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기준이었다. 장기 집권을 위한 기준이었다. 그가 정한 기준과 요건에 적합하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유신의 기준'이었다. 그 기준 어겼다고 생사람 잡아다 죄 뒤집어 씌워 8명이나 죽인 게 인혁당재건위 사건이었다. 긴급조치 1·4·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만도 1000명이 넘었다.

대학졸업­교사­학원강사 경력의 임구호 씨는 1969년의 3선 개헌 반대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1974년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로 엮여 들어갔다.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7년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임 씨는 당초 잡혀 들어갔을 때, 중앙정보부 조사에서도 인혁당이란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검찰에 가서야 처음 들었다.

그는 서울 남산의 정보부에서 매일 길이 90㎝되는 각목으로 얻어맞으면서 척추 꼬리뼈가 부러지면서, 시키는 대로 인혁당 관련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만들어 주었다. 동물농장에서 '인혁당 만들기'를 했다. 그는 현재 그 후유증으로 5급 장애자가 되어 병원을 들락거린다. 사형선고까지 받은 이철 씨도 인혁당이 뭔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 나라의 70년대는 그렇게 박정희 씨의 장기집권 목표 하나 때문에 피 맺히고 한과 눈물이 질펀하게 깔리던 시절이었다.

특히 인혁당재건위 희생자 유족들의 한과 눈물은 요즘에야 조금씩 알려지지만 처참하기가 비할 바 없었다. "목욕탕 간다고 나간 남편이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간첩이 되어 TV에 나왔다"고도 했다. 남편에게 일생을 걸던 곱던 아낙이 남편을 빼앗긴 뒤 이제 한 세대가 지나 쭈글쭈글한 노파가 되었다.

한 희생자의 부인인 A 씨는 악에 받쳤던 때를 회상한다. "남편이 사형 당한 후 신문에 나는 박정희 사진을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다"고 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갔다가 발길을 돌릴 때마다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으라"고 외쳤다고 했다. 박정희 씨가 피격된 1979년까지 계속 그랬다고 했다.

다른 희생자의 부인 B 씨는 남편에 대한 조사를 받던 중 기관원이 주는 물을 마셨다가 흥분되면서 온몸이 꼬이는 참혹한 경험을 했다. 그때 '남편은 간첩'이라는 진술서를 쓰고, 죄책감으로 아이들과 극약을 먹으려 했으나 친정어머니에게 들켰다. 본인과 아이들은 죽음을 면했지만 친정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한 달 만에 눈을 감았다.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 다른 희생자의 부인 C 씨의 눈물겨운 이야기. 저녁때가 되어도 아들이 집에 오지 않았다. 동네 놀이터에 가봤더니 동네 아이들이 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매고 '총살놀이'를 하고 있었다. "빨갱이 자식"이라 놀리고 있었으나 놀이터의 몇몇 어른들은 보고만 있었다. "저 아이와 함께 놀면 너희들도 잡혀 간다"는 소리도 들렸다. 경찰관 시험에 합격했으나 합격 취소 통지를 받은 친척도 있고, 친척들 여권도 내 주지 않았다.

진술 내용과는 정반대되게 조서가 조작돼 있기도 했고, 심지어 희생자들의 유언도 교수형 입회 교도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만들어져 있었다. 진실을 보도해 달라고 그토록 발이 닳게 언론사에 쫓아 다녔으나, 진실 보도는커녕 억장 무너지는 기사도 나왔다. <대법원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심혈을 기울여 심리하고 선고한 것이므로 더 이상 불복할 여지가 없다.> (교수형 다음날 인) 1975년 4월10일자 어떤 신문의 사설이었다.

대법원 판사 D 씨의 기절할 이야기도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판결이 나온 것은 1975년 4월8일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D 씨는 자기도 서명한 것으로 되어있는 그 때의 판결문을 본적이 없다. 2002년 12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가 있고 나서야 그 판결문을 보았다고 실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그런 사건이었다. 박정희 씨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그렇게 이끌고 갔다.

독재자였다는 평판 때문에 잊혀져가던 박정희 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 때문이었다. <한겨레 21>의 보도에 따르면 10ㆍ26이후 13년간 박정희 씨의 이름을 올리지 않던 조선일보가 김영삼 씨의 대통령 취임 후부터 집중적으로 박정희 씨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10ㆍ26이후 2009년 10월까지 실린 박정희 기사 3459건 중 93.6%인 3231건이 김영삼 씨 취임 이후 보도됐다고 했다. 인기가 바닥인 김영삼 씨의 '무능'과 대비되는 '강력한 리더십의 유능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억의 형태로 기사가 등장했다고 <한겨레 21>은 보도했다.

1995년 3월부터는 '가장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누구입니까'를 묻는 여론조사를 시작했다. '1위 박정희'일 개연성이 많은 시점이었다. 집중적인 찬양보도가 줄기차게 계속되다가 1997년 10월부터 3년 동안 연재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박정희 부활'의 결정판이 된다. 박정희 씨는 생전에 기자들을 만났을 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지만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한 것을 역사는 제대로 평가해 줄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말이다. 지난 10일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박근혜 후보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말 속에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아버지의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의 연재기사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정희 씨는 부활됐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과오도 덮어지는 양상을 보였고, 심지어 "어느 누가 '박통(박정희대통령)'의 허물을 말 할 수 있느냐" "누가 박통에게 침을 뱉을 수 있느냐"는 눈 부라림까지 느껴지는 상태가 되었다. 박정희 씨는 그렇게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만들었다. 더구나 역대 정권을 살펴볼 때 여건도 좋았다.

전두환 씨의 광주학살이 너무 잔인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박정희 씨의 혹독한 인권탄압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박정희 씨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역사를 바로 잡는 평가가 시도되지 못한 측면까지 있다. 김영삼 정부는 박정희 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씨와 3당 합당으로 손을 잡고 출발한 정권이었다.

김대중 씨는 김종필 씨와 연합한 소수정권이면서, 오히려 '용서'를 내세워 박정희 기념관까지 짓도록 지원해 주었다. 노무현 씨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데다 '박근혜와의 대연정'까지 생각하던 정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해봐야 할 때다. 겸손한 마음으로 냉정한 눈으로 평가하고 정리해야 할 때다. 역사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 특히 이번에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계기로 그런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보리고개를 없애고 경부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 등의 업적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집권 18년 동안 늘어난 1인당 극민소득이 1600달러에 불과하고, 대기업 수출 밀어주기의 그늘에서 혹독한 저임금으로 고통 받던 근로자들의 희생을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역대 대통령 중 IMF 때를 빼고는, 소득에서 박정희 대통령 때보다 못한 대통령이 하나도 없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공(功)과 과(過)를 있는 대로 늘어놓고 각각 다른 서랍에 집어넣으면서, 과대 포장된 것도 포장 벗겨 내용을 확인 할 필요가 있다. 공정하고 준엄한 평가가 필요한 때다. 그는 과연 사심없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만 일 했는가. 근대화와 산업화만을 위해 몸을 던졌는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호통 칠만한 삶을 살았는가.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와 영남대학교를 개인 소유로 돌려놓은 것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유신반대 데모한다고 서울문리대 해체한 것도,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가 1000명 넘도록 인권을 탄압한 것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일도, 근대화나 산업화의 과정도 아니었다.

허나 그런 것 다 양해한다 치더라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통해 드러난 참혹한 사법 살인사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숨이 막힌다. 참을 수가 없다. 절망한다. 그 무덤에는 침을 뱉어야 한다. 



원문 : http://blog.ohmynews.com/dhghdrms01/480995




이명박ㆍ박근혜 대통령의 본모습

원본게시날짜 :  기사입력 2013-03-18 오전 9:20:32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74> "투표한 손가락도 책임 느껴야"



오홍근 칼럼니스트    필자의 다른 기사


무릇 모든 나라의 국민들에게는 자기들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가질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나라의 국민들은 자기들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가질 의무도 지니고 있다.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 쿠데타나 유신이나 긴급조치 같은 강압적인 물리력을 부당하게 사용하지 않았다면, 대체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속임 당한 상태로, 선거과정에 국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공정하게 반영되지 않았다 해서, 이해가 다른 진영의 주장이 엇갈릴 경우 논란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 나라에서는 2007년 대선에서도, 투개표 상의 부정이 없는 상태에서 이명박 씨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2012년 대선에서도 투개표 상에 문제없이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이 나라 국민들 수준에 맞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데 이의를 달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

물론 국민의 수준에 맞는 대통령이 된 것 만으로, 훗날 "이명박 씨가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거나, "박근혜 대통령이 틀림없이 뛰어난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지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 있다. 그렇게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나와 있다. 특히 그에 대한 평가는 다른 대통령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나온 듯하다.

이명박 씨 본인은 퇴임하면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한 대통령"이라 했고, "지난 5년은 가장 보람되고 영광된 시간이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 말 그대로 믿을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다. 언론 자유로 상징되는 민주주의를 파탄 냈고, 서민경제를 파탄 냈으며, 남북관계를 이 모양 이 꼴로 까지 파탄 내놓은 게 그의 5년이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권을 사적(私的) 이권(利權)으로 알고 주물러 댄 게 그의 5년이었다.

이상득 사건이며 최시중 사건이며 박영준 사건이며 다 그런 것들 아닌가. 수상한 동기부터도 그렇지만, 포항 동지상고 출신들이 판을 친 4대강 사업을 비롯한 숱한 토목공사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통치'행위를 하면서 이명박 씨 만큼 검찰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대통령도 별로 없다. 밉거나 말 안 듣는 쪽은 쫓아가 마구 물도록 했으며, 사람 '잡아넣고 풀어주고'를 자의적인 잣대로 밀어 붙인 것 모르는 사람 별로 없다.

심지어 검찰총장이 사건을 보고 받을 때마다 "어느 쪽이 우리 편이냐"를 묻곤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전직 대통령을 죽게도 했다.

MB 정권 5년이 숱한 비리로 얼룩져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MB 다운'사건도 바로 검찰 쪽에 얼굴을 묻고 있다. 필자는 '얼굴을 묻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이 나라 언론의 '협조'로 묻혀있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나라가 들썩 거릴 만큼 크게 보도되고 추적되어야 할 사건이었다. 일부 언론에 의해 그냥 일과성(一過性) 보도가 되는데 그치고 만 사건이었다. 2011년 12월 15일 일어난 '퇴직 검찰총장의 현직 대통령 협박사태'가 그 사건이다.

이날 김준규 (당시) 전 검찰총장은 자청해 기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검찰총장 재직 때 한 로비스트의 소개로 이국철 SLS회장을 만나 로비를 받은 게 아니냐는 일각의 의혹 제기에 대해 해명을 하는 자리였다. 현직 검찰총수가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의 피고인을 만난 것을 놓고 그는 '민원'을 들어보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총장으로서 상황 판단을 하기위해 만난 것인데 로비를 받은 것처럼 몰아세우면 내가 너무 '올라온다'"고 불만을 쏟아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그 자리에서 '폭탄'을 터뜨린다. "내가 열 받아서 (총장 때 일을) 다 까버리면 국정 운영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마디로 나 '귀찮게' 하지도, '손 댈' 생각도 하지 말라는 폭탄선언이었다. 김준규 씨의 검찰총장 재임기간은 특히 MB정권의 온갖 냄새 나는 사건들이 검찰에서 다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한상률 국세청장 수사, 민간인 불법사찰에리카 김 면죄부 등도 그런 사건들이었다. 그런 사건들의 밝힐 수 없는 내막을 다 알고 있다는 으름장이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김준규 씨의 발언이 당시 정권과 검찰에 대한 경고내지 협박이라고 보았지만, 말은 바로 할 필요가 있다. 국정운영의 주체이면서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그의 말은 누가 뭐래도 당시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한 협박이었음이 분명했다. 이 기막힌 사태 앞에서, 희한하게도 대통령은 그런 협박을 당하고도 입을 다문 채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수사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다.

김준규 씨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삼고자 한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 꼬투리들'이 어떤 것들이고 얼마나 되는지 우리 같은 민초들로서는 알 길이 없다. '퇴직 검찰총장'과 협박받은 '현직 대통령'만이 알고 숨겨둔 내용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이명박 정권·이명박 대통령의 본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이 되었다. 물론 그 사건은 국민을 능멸한 범죄였다.

▲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청와대 제공

박근혜 대통령의 본 모습을 나타내는 사건은 너무나도 일찍 얼굴을 내 밀었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인수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부터였다. '박정희 신봉자'이면서 극단적 극우 성향의 편향된 우격다짐 논리를 써대던 윤창중 씨를, 그것도 대변인으로 임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본 모습을 짐작케 하는 인사전횡은 시작되었다. 물론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의 통치나 정치를 하기 위해,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필요한 자리에 앉히는 인사발령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쉽게 말해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국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자리다. 따라서 국민들이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사를 해가는 게 순리다. 초장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는 인사들이 그녀 곁으로 속속 불려갔다. 윤 씨 말고도 "5ㆍ16 쿠데타는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했다"는 역사왜곡 발언을 서슴지 않던 교수, 박정희 씨의 총애를 받던 정치인의 아들, 유신헌법을 기초한 인사의 사위도 인수위원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어 발표된 장관급 인사를 보면 그녀가 나라를 이끌고 가고자하는 방향과 소신과 고집이 그대로 배어 나온다. 아버지 시절 청와대 비서실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던 인사,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박정희 식 압축성장'의 밑그림을 그리던 인사, 박정희 정권에서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인사의 아들, 5ㆍ16 쿠데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교육부문 고문으로 교육정책 수립에 기여한 인사의 아들 등 박정희 씨 색깔이 짙은 인사들이 줄줄이 이름을 올렸다.

심지어 휴대폰 고리에 박정희 씨 내외의 사진을 매달고 다니던 전직 4성장군도 장관으로 내정되었다. 물론 휴대폰 고리 사진만으로 장관에 내정된 건 아니었겠으나, 그는 허위 재산신고 의혹 등 30여 가지의 구린내가 난다고 말들이 많았다. 주목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일련의 인사가 '박정희 시절로의 회귀나 박정희 씨의 복권'을 염두에 둔 건 아닌지 하는 국민들의 불안한 눈빛이다.

지난 해 여름이던가, 오랫동안 박근혜 당시 후보의 개인 변호사 역할을 해온 김재원 의원이 기자들에게 밝힌 이야기가 있다. "박근혜 후보가 정치를 시작한 이유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복권"이라 했다.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이게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아닌가"하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박정희 사단이나 박정희 통치방식의 복원작업'일 수 있다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건 그야말로 작은 일이 아니다.

다 알다시피 5ㆍ16은 불법 군사 쿠데타였다. 10월 유신과 인혁당 사건과 긴급조치 등은 박근혜 대통령도 잘못임을 시인하고 사과한 사태들이다. 그런 박정희 씨에 대한 향수를 부추기면서 추종작업이 혹시라도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건 막아야 한다.박정희 씨의 사전에 언론자유나 민주주의는 없다. 그가 총칼로 밀어붙이며 외쳐대던 '국론통일(國論統一)'의 구호 속에 대화나 타협이나 협상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그의 딸이 "(내가 밀어 붙이는 정책은)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일수불퇴(一手不退)식 인사가 소신으로 둔갑해 추진되고 있는 것도 우리는 보고 있다. '박근혜 스타일'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 씨가 원조인 한국형 군사문화 방식이다. 군사문화는 승리를 전제로 한 문화다. 군사문화에서 패배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 게 박근혜 대통령의 본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대통령을 뽑아놓고 얼마가 지난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표한 손가락을 잘라내고 싶다고 농담을 한다. 관련해서, "앞으로는 손가락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좋은 대통령을 가지려면 (손가락 탓 같은) 핑계만 댈 일이 아니라 국민들 스스로도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해가야 할 대목이다.

※ 필자는 지난해 대선 전 한 후보의 캠프에 합류하면서 '공정한 글을 쓸 자신이 없어' 스스로 칼럼을 중단했었다. 여기에 개인적 사정까지 겹쳐 5개월여 만에 다시 펜을 든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와 성원을 부탁드린다.

원문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30318081420&section=01&t1=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