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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5일 금요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통령의 '엄벌'이 아니다

원본게시날짜 :  김용언 기자 2014.04.25 20:31:47

[이렇게 읽었다] 아만다 리플리의 <언씽커블>



1917년 12월 6일, 캐나다 노바 스코티아 주의 핼리팩스 항에서 벌어진 비극은 "인간이 당한 재난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2500톤 이상의 폭발물을 실은 프랑스 화물선 몽블랑 호가 좁은 수로에서 대형선박 이모 호와 충돌했다. "물 위를 떠다니는 시한폭탄"이었던 몽블랑 호에 불이 붙었고, 항구 안으로 다시 흘러들어온 배는 부두에 부딪혔고, 부두에 그 불이 옮겨 붙었으며, 몽블랑 호는 20분 뒤에 마침내 폭발했다. 

"검은 비와 쇠, 불, 바람이 도시로 휘몰아쳤다. 충격은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창문들을 박살냈고, 유리 파편 때문에 천여 명이 실명했다. 그 뒤 폭발로 인한 해일이 해안을 집어삼켰고, 도시 전역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항구에서는 불과 연기의 검은 기둥이 흰 버섯구름으로 변해 있었다. 생존자들은 하늘에 독일군 폭격기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며,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 그날 밤 핼리팩스에 몰아친 눈보라는 서사시의 대미를 장식했다. 대참사가 휩쓸고 지나간 뒤, 그곳의 사망자는 1963명에 이르렀다. 눈보라가 그친 뒤에 촬영한 필름을 보면, 핼리팩스는 핵무기로 파괴된 도시처럼 보였다."

▲ 1917년 핼리팩스 폭발 사건 이후의 풍경. ⓒWikimedia Commons
▲ 1917년 핼리팩스 폭발 사건 이후의 풍경. ⓒWikimedia Commons
당시 핼리팩스의 재건을 앞장서서 도왔던 영국 국교회 신부이자 학자 새뮤얼 헨리 프린스는 1920년 "재난에 직면한 인간 행위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연구서"인 논문 '재난과 사회 변화’를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 이렇게 썼다. 

"삶이 쇳물처럼 녹아내렸다. 고래의 관습은 무너져 내렸고, 모든 것이 불안정해졌다."

95년 전에 쓰인 이 문구가 가슴을 짓눌렀다. 현재 한국을 뒤덮고 있는 슬픔과 경악과 분노와 무력감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 <언씽커블>(아만다 리플리 지음, 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 ⓒ다른세상
▲ <언씽커블>(아만다 리플리 지음, 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 ⓒ다른세상
하지만 아만다 리플리의 책 <언씽커블>(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은 20세기 내내 인류를 고통스럽게 한 각종 재난의 이유를 탐구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부제는 '생존을 위한 재난재해 보고서’다. 그녀는 '재난'이라는 영어 단어 'disaster'가 "라틴어 dis(벗어나다)와 astrum(별)이 합쳐"졌음을 지적하면서, 재난이란 "운명의 별이 궤도를 벗어나 운수가 사납다"는 식의 공포와 미신에서 벗어나, 혹은 "신과 정부의 소관"으로만 생각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위험지대에서 안전지대로 가기 위해 우리 모두 지나가야 하는 생존의 길"을 찾자고 제안한다. 어찌 보면 '서바이벌 실용서'에 더 가깝다. 

아만다 리플리는 쓰나미든, 화재든, 추락사고든, 침몰사고든, 교통사고든, 혹은 테러든 어떤 종류의 재난에 맞닥뜨리는 순간 사람들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거부-숙고-결정적인 순간이 그것이다. 불운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대개 "만사가 괜찮다",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라고 여기며 움직이지 않거나 애써 상황을 과소평가하거나 또는 공포에 압도당한 채 그저 '놓아버린다'. 하지만 관련 정보를 제대로 숙지했고 재난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생존에 필요한 몇 초(몇 분이 아니다)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판단력을 가졌다면, 재난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는 지역, 자신의 행동 패턴에 언제라도 끼어들 수 있을 어떤 종류의 재앙을 미리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우리의 뇌와 몸에 기계적으로 생존의 습관을 들여놔야만 실제 재앙 앞에서 두려워하고 움츠러들고 '누군가 구해주겠지'라고 기다리느라 시간을 지체할 게 아니라 생존할 수 있는 단 몇 초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는 점점 복잡해지며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에 무관심해지고 있지만, 그에 순응하며 사고 현장에서 희생자로 등장하지 말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재난은 계급, 인종, 성별을 막론하고 덤벼들며,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초인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이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리플리의 결론이다. 

"공포는 두 가지를 요구해요. 위협에 대한 인식과 그런 위협에 대처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죠." (…) 공포는 이해하면 물리칠 수 있다. 

<언씽커블>의 전체적인 논조는 낙관주의다. 자신감에 찬 저자 아만다 리플리는 재난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를 해야만 한다고, "여러분을 구해줄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며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능력이 급박한 상황에서 상상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음을 굳건하게 믿는다. 물론 이런 주장은, 세월호에서 "대기하라"라는 안내 방송만 믿고 구명조끼를 입은 채 얌전히 기다렸다가 참혹한 변을 당한 단원고 학생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리플리의 주장은 모든 책임을 개인이 져야 한다는 '자력 갱생'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이 그와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시스템에 의해 뒷받침된 정확한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는 경고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17년 핼리팩스 항의 무참한 사고를 겪고 난 다음,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벌어진 다음,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집어삼키고 난 다음, 2005년 346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던 메카 순례 이후,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을 무차별 난사 살해한 조승희 사건 이후, 1994년 852명의 승객과 함께 발트 해 밑으로 침몰한 에스토니아 호 사건 이후 각국 정부와 해당 단체들은 다시는 유사한 사고가 벌어지지 않도록 돈과 시간을 들여 만전을 기했다. 그들은 이전의 안전불감증과 게으름을 답습하지 않으려 했다.
일례로 아만다 리플리는, 1993년 알카에다가 처음으로 세계무역센터에 폭탄테러를 가한 뒤 그곳에 입주했던 모건 스탠리 딘 위터 사의 보안책임자 릭 레스콜라가 취했던 조치를 대단히 감동적으로 기술한다. 레스콜라는 이후 8년 동안, 분초단위를 다퉈야 하는 주식 중개인들의 불만을 무시한 채 매우 자주 대피 훈련을 실시했다. 세계무역센터 73층에 입주한 모건 스탠리의 직원들은 투덜거리며 레스콜라의 지시에 따라 44층까지 걸어 내려가는 훈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또 다시 테러가 발생했을 때 레스콜라는 메가폰을 든 채 계단참에 서서 "조용히 하시고, 진정하세요.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라고 되풀이 격려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모건 스탠리 직원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왔고, 미처 사무실에서 나오지 못했던 열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 2687명은 그렇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 팽목항의 체육관에서 애타게 구조 소식을 기다리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 ⓒ프레시안(최형락)
▲ 팽목항의 체육관에서 애타게 구조 소식을 기다리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 ⓒ프레시안(최형락)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법과 규정을 어기고 매뉴얼을 무시해 사고원인을 제공한 사람들과 침몰 과정에서 해야 할 의무를 위반한 사람들, 또 책임을 방기했거나 불법을 묵인한 사람 등 단계별로 책임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꾸지람'이 아니라, 앞으로 이러저러한 대비를 실행에 옮기겠다라는 구체적인 약속이다. 이를테면 시민단체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지난 4월 24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해양안전정책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가 2013년 작년 실시한 위기대응훈련은 고작 3번이었다. 그나마도 현장 훈련이 아니라, 실내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논의한 '토론식 훈련'이었다고 한다. 요식적인 탁상 논의로 규정을 대강 지키는 시늉만 하다가, 막상 참혹한 비극이 닥쳤을 때 우왕좌왕하며 서로 말이 엇갈리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언씽커블>은 전적으로 한국 상황과 맞아 떨어지진 않더라도,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무기력증을 벗어나기 위한 몇몇 단초들을 제시해준다. 2009년에 출간된 이 책이 벌써 절판 상태라는 게 아쉽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직접 쓰는' 책이 더 시급하게 필요하다.


원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671




2014년 4월 19일 토요일

올가을에 결혼식 올리려 했는데…

원본게시날짜 :  인천뉴스=김원빈, 김덕현 기자 2014.04.19 22:19:37

[언론네트워크] 세월호 참사, 초등 동창생 환갑여행·예비부부 등 안타까운 사연


"청천벽력 같은 소리죠. TV에서 남 얘기만 듣다가 막상 내 일로 닥치니까 그 기분을 알 것 같네요.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이건."

환갑 기념으로 제주도로 떠난 용유초등학교 28회 동창회장 백평권(61) 씨의 동생 백모(55) 씨가 참담한 기분을 전했다.

"형수도 어제 링거 맞고 오늘 안정돼서 빈소를 지키고 있는 거예요."

18일 오후 3시 인하대병원 백평권 씨의 빈소에는 지인들과 상주, 백 씨의 부인이 지키고 있었다. 간간이 조문객도 이어졌다.

현재 인하대병원에는 용유초 동창 4명을 포함해 세월호 침몰 사고 구조자 8명이 입원 치료 중이다.

구조자들은 취재진의 인터뷰가 잦고, 일부 구조자는 말다툼까지 벌어져 병원측을 통해 인터뷰와 면회를 거절하고 있다.

세월호 탑승객 중 용유초 동창생은 모두 17명이며 현재까지 18일 오후 1시 기준으로 강인환·김정근·차은옥·이중재·심창화씨 등 5명이 구조됐고 백평권 씨가 숨졌으며 심숙자·인옥자·윤춘연·최창복·정중훈·김순금·문인자·정원재·김연혁·이세영·최순복 씨 등 11명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생 백 씨는 "아직 장례는 치르지 않은 상태로 빈소만 차려 놨고 나중에 동창생들의 생사가 확인되면 합동분향소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백 씨는 평소에 선행을 베풀어 왔으며 대부분의 동창생들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길병원 장례식장에서도 안타까운 사연은 이어졌다.

"기웅이와 현선이는 4년 전부터 사귀었다. 기웅이가 인천대를 졸업하면 올가을쯤 결혼시킬 계획이었는데…. 하늘나라에서라도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영혼결혼식이라도 올려줄까 한다."

올가을 결혼을 약속한 김기웅(28) 씨와 정현선(28) 씨가 함께 세월호에서 숨진 채 발견돼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김 씨는 인천대에 입학해 군대에 다녀온 후 4년 전부터 세월호에서 불꽃 연출 아르바이트를 하며 승무원으로 일하던 정 씨를 만나게 됐다.

지난 14일 기웅 씨는 제주도행 오하마나호에 승선했고, 16일에도 세월호가 아닌 오후에 출항하는 오하마나호에 승선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기웅 씨는 단원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이벤트를 마련하기 위해 일정을 바꿔 15일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천으로 되돌아와 그날 저녁 세월호에 승선했다.

결국 기웅 씨는 지난 17일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데 이어 18일 오전에는 현선 씨의 사망 소식까지 전해졌다.

인천길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모친 김광숙(59) 씨는 "처음 사고를 접하고 현선이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우리 기웅이까지 세월호에 탔다는 사실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며 "아들이 제주도에서 봄에 신을 운동화를 사다 준다고 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빈소를 찾았던 이웃주민 한모(63) 씨는 "기웅이가 어릴 때부터 착실하고 효자였다"며 "생각도 못한 일이 일어나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정 씨의 시신은 이날 오후 119구급차로 목포중앙병원에서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지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기웅 씨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촌동생인 방현수(21) 씨도 세월호에 탑승해 아직까지 생사가 알려지지 않아 슬픔을 더 하고 있다.

방 씨의 아버지인 방기상 씨는 "현수와 기웅이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착실한 아이들이었다"며 "부모에게도 정말 잘하는 아이들이어서 참담할 따름"이라고 말을 아꼈다.



원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460




2014년 4월 18일 금요일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 "다 죽고 시체 꺼내려 하나"

원본게시날짜 :  2014.04.18 10:07:17  이명선 기자


뉴스클립] "아이들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 호소문 발표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호소문을 발표했다. 

가족들은 18일 전남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국민 여러분 정부의 행태가 너무 분해 눈물을 머금고 호소하려 한다"며 정부의 안이한 대응을 비판했다. 

사고 직후 "모두 구조됐다"는 발표에 아이들을 보러 현장에 도착했지만, 실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것. 가족들은 "현장에는 책임지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상황실도 꾸려지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이들은 또 피해자 생존 확률이 높은 사고 첫날 "민간 잠수부를 동반해 사고 현장을 방문하려 했으나 아예 배도 못 띄우게 하고 진입을 막았다"고 말했다. 당시 "아이들은 차가운 물 속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탄식도 이어졌다. 

해경과 군 당국이 본격적인 구조 활동을 시작한 17일에도 정부의 안이한 태도는 여전했다. 가족들은 "어제 현장을 방문했지만 헬기 2대, 배는 군함 2척, 경비정 2척 특수부대 보트 6대, 민간 구조대원 8명에 불과하고 인원도 200명도 안 됐는데 정부는 인원 555명, 헬기 121대, 배 69척을 투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과 현장 상황은 판이했던 셈이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학부모 김중열 씨는 이날 JTBC와의 인터뷰에서 "여기는 방송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이 그걸 좀 아셔야 한다. 방송에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 씨는 이어 정부의 구조 작업이 적극적이지 않다며 "애들 다 죽고 나서 시체 꺼내려고 기다리고 있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414




뱃머리마저 침몰…세월호 사망자 28명으로 늘어

원본게시날짜 :  김윤나영 기자 2014.04.18 14:06:43

해경 관계자 "파도에 보였다 안 보였다"…시신 3구 인양


세월호가 사고 발생 3일째인 18일 오후 1시께 완전히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해양경찰청에 따르면, 18일 오전 9시께까지만 해도 뱃머리가 50센티미터~1미터가량 물 위로 드러나 있었지만, 오후 12시 30분 이후에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육안에서 사라졌다.
   
오후 1시께 해양경찰청 관계자는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세월호가 파도에 의해 위아래로 움직여서 보이다, 보이지 않다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틀간 수면 위로 보이던 뱃머리는 '에어 포켓(배 안에 남아있는 공기층)' 지점으로 주목받은 부분이다.

또 사고 인근 해역에서 시신 3구가 추가로 발견되면서 사망자는 28명으로 늘었다.

해경은 이날 오전 11쯤 세월호에서 400~500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구명조끼를 착용한 50대로 추정되는 남성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후 오후 12시~12시 20분께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2구를 추가로 인양했다.  

추가 인양된 세 명 모두 구명조끼를 입은 채 수면 위에 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원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