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박근혜, 정수장학회서 연간 1~2억 받았다

원본게시날짜 :  입력 : 2012-10-23 11:01:48 노출 : 2012.10.23 18:06:33


[인터뷰]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독재자 박정희의 유전자 흘러”
조수경 기자 | jsk@mediatoday.co.kr


1980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한 김재홍 경기대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가장 많은 자료를 축적한 인물로 꼽힌다.  22일 경기대에서 만난 김 교수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 대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매우 혹독한 독재자였던 그의 권력 유전자가 흐르고 있어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한 정수장학회는 박 전 대통령의 문제가 아니라 박 후보 본인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박근혜씨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으며 전반 5년간은 연간 1억3500만 원 가량을, 후반 5년간은 2억5000만 원 가량을 받았다”며 “나는 박근혜씨가 정수장학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융통했다고도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고 김지태씨의 차남 김영우씨는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 이사장 재직시절 전반 4년 간 1억3500만 원을 받았으며, 이후엔 2억5350만 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다 합산할 경우 10년 간 20억6000만 원 가량이 된다. 김지태씨의 유족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위원회에 관련자료를 제출했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78년부터 80년까지 동아일보에 있었다. 유신 말기부터 전두환 정권의 탄생을 봤는데 언론인으로서 유신 말기를 어떻게 평가하나.  
"박정희 유신 독재 아래 한국 언론의 위상은 참담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권운동단체인 프리덤하우스에서 매년 각 나라들의 언론 자유 평점을 7등급으로 매겼는데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는 1등급이었고 언론인에 대한 테러, 납치, 투옥이 있으면 2등급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캄보디아, 아프리카와 같은 5등급이었다. 한마디로 언론자유가 말살된 상태였다. 또 하나의 지표는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유학을 가는 하버드 리먼펠로우십에 한국의 기자들은 유신이 선포된 1972년부터 초청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6월 항쟁이 일어난 1987년까지 거절당했다. 한국은 언론 자유가 없으므로 자유 언론이 인정된 기자들과 함께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언론탄압만 들어도 유신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시절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던 박근혜 후보에 대한 당시 시선은 어땠나. 
"그때는 그다지 시선이 집중되지는 않았다. 다만 당시 박근혜 후보가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공인으로서의 첫 번째 활동이 최태민 목사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였다. 하지만 중정에서 내사를 하고 박정희가 박근혜, 최태민 목사를 불러다 친국까지 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이후 김재규씨를 통해 최태민 목사가 성금과 후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정희의 큰딸과 함께했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겠나. 정부기관과 경제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니 돈도 그만큼이나 모인 것이다."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의혹이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는 '9억 원'의 실체다. 증여세를 내지 않은 게 문제인가, 돈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문제인가.
"10·26 이후 12·12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가 청와대를 수색했는데 철재 금고 속에서 9억 원을 발견했다는 거 아닌가. 그 중 3억원은 박근혜씨가 수사비로 돌려줬다.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나온 돈이니 대통령의 사유재산이라고 여겨서 준 돈인지, 사유재산이라고 한다면 정당하게 모은 것인지 규명해야 하는데 그런 절차가 없었다."
"만약 기업인으로부터 받은 검은 돈이라면 이건 범죄행위이다. 사실 대통령 연봉이 얼마인데 9억 원을 가질 수 있겠나.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의 9억 원이라면 지금으로선 90억 원에 가까운 돈이다. 통상 38억 원이라고 하지만 이는 임금지수·물가지수·인플레이션 등을 따져 아주 보수적으로 계산한 법정환산금이다."
  
▲ 김재홍 경기대 교수
이치열 기자 truth710@

-최근 박근혜 후보는 최근 정수장학회가 강탈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정수장학회는 부산의 유력한 기업인인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를 빼앗아 만든 것이다. 김지태씨는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오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소신있는 기업인이기도 했다. 그가 부일장학회를 (박 전 대통령의 강압에 못 이겨) 강제 헌납했다는 것은 국정원과 진실화해위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올해 2월 판결도 ‘강제 헌납이 있지만 완전히 자유의사가 박탈당한 상황인지 확실하지 않고 주식을 환수할 수 있는 시효기간이 지났다’고 한 것이지 '강압에 의한 강탈'은 분명 인정했다."
"박근혜 후보가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판결문을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박 후보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대법원이 '두 가지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논란이 됐다. 유신 시절의 대법원과 이후의 대법원이 어떻게 같은 대법원인가. 이를 단순히 박근혜씨의 무지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무지를 가장한 거짓말인지를 검증해야 한다. 박 후보의 측근이 문제라는 식으로 보도하는 언론도 문제다. "
-박 후보는 정수장학회가 부일장학회의 재산만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기업들과 해외 동포들의 후원도 받았다고 하며 사실상 부일장학회와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독재권력의 위협을 받아 돈을 내놓은 것인지는 좀 더 취재해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정권을 눈치를 보며 돈을 내지 않았겠나. 그런 것들을 박근혜 후보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일례로 정주영씨가 대선 후보로 나오면서 '나도 돈을 갖다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와 정체성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맞나."
-정리하자면 박근혜 후보는 유신 체제 유지에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나.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의 사망 당시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었던 그는 사실 원숙한 퍼스트레이디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해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게 사법살인이 일어났다. 퍼스트레이디는 비서관들을 통해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보고를 받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들을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너무 지나치다'고 간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구국여성봉사단도 총재로서 투명하고 건실하게 운영하면서 약자들을 도왔다면 충분히 호평 받을 수 있었다."   
-박근혜 후보에게서 유신의 잔재를 발견할 때가 있나. 
"매우 가혹한 독재자였던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흐르고 있어서 문제다. 단순히 박근혜씨가 그의 딸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정치 행보가 그렇다. 5·16 쿠데타를 ‘구국의 결단’ 혹은 ‘혁명’이었다고 미화했다. 이는 역사관의 문제다. 5·16쿠데타는 1961년 사회혼란성과 무능의 산물이 아니다. 박정희는 이미 10년인 1952년 이종찬 장군을 찾아가서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한 바 있다. 일본 육사 출신이지만 참군인으로 추앙받았던 이종찬 장군은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정치군인으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정수장학회 강탈이다. 박근혜씨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으며 전만 5년간은 매년 1억3500만 원가량을, 후반 5년간은 매년 2억5000만 원가량을 받았다. 이때 그는 국회의원도 했고 당 대표까지 맡았다. 이사장으로 상근할 수 없으니 비상근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바꾸기도 했다. 정말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싶었다면 이렇게 많은 연봉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박근혜씨가 정수장학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융통했다고도 평가한다. 정수장학회는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라는 차원이 아니라 박근혜 본인의 문제이다."



원문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663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