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8-30 13:18:14 노출 : 2011.08.30 13:37:30
[金土日의 리트윗] 한국 민주주의 성숙에 일조했던 개신교…'희망의 노래'가 없다
개신교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최근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이 나라의 각종 정치적 현안에 대해 매우 과감하고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때론 위법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르고 있는데 역으로 그만큼의 부정적인 여론도 비등하다. 이들은 현재로서도 사회적으로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이 나라의 현직 대통령까지도 교인으로 거느리고 있지만,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듯 좀더 강력한 세력 규합에 나서는 중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내친 김에 정당 결성에까지 나서겠단다.
개신교가 정당을 결성한다고?
무작정 비판하거나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시대이든지 종교가 가장 주목받고 인정받는 때는 사회적 활동, 정치적 참여를 적절한 때에 열렬한 수준으로 수행하던 순간이니까 그렇다. 게다가 종교란 것이 근본적으로 가난한 자와 헐벗은 자를 위한 실천, 정의와 진리를 향한 행동에 그 존재론적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적극적인 사회적 발언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정치적 결사체를 구성하는 것도 나름 괜찮은 일이다.
종교는 역사적으로 때로는 억압적 체제의 발원지였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해방 운동의 강력한 동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함께 해온 기독교 역시 이러한 양면적 속성을 뚜렷이 지니고 있었고 굴곡 많았던 오랜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사회적 참여가 일구어낸 구체적 성과는 작지 않았다.
음악 영역은 최근 움직임이 활발한 개신교의 사회적 참여 전통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이 땅에 자리 잡은 100여 년 동안 음악을 이용해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으니까. 음악은 사회 계몽의 주요한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노래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널리 전파되었다. 천주교가 한국의 음악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선교에 나섰다면 개신교는 서양의 이질적인 음악적 전통을 직접 이식하는 방식을 택했고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만큼 음악적 파급효과도 상당했다.
구한말 애국 운동에 기여한 찬송가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대한제국 ‘공식’ 애국가(1902)가 제정되기 전에도 사회 곳곳에서는 이른바 ‘애국가’가 만들어지고 애창되었다. 조선사회에 드리운 제국주의 세력을 보며 나라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많은 애국가류의 노래들이 교회를 통해 만들어지고 전파되었다. 또한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애국가류의 노래는 찬송가의 선율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그 이후에도 애국가의 선율로 가장 유명했던 것은 <작별>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올드 랭 사인>이다. 이 노래는 원래 스코틀랜드의 민요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찬송가로 먼저 전파되었다. 지금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제목의 찬송가로 또 졸업식의 대표적인 송가로 애창되고 있다.
음악을 통한 개신교의 사회 참여는 발군의 음악인들을 탄생시켰다. 친일파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주옥같은 노래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수놓은 홍난파, 최근 한국 최고의 작곡가로 재조명되며 얼마 전 KBS에서 그의 일생을 다룬 프로그램 편성을 두고 커다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정율성 등 대표적인 한국의 음악인들이 모두 개신교를 통해 음악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다.
크리스챤아카데미, 노래운동의 산파
일제시대가 끝나도 만족할 만한 자유와 해방이 찾아오지 못했던 까닭에 음악을 통한 개신교의 사회 참여는 지속되었다. 유신시절의 폭압적 통치 하에서 어느 누구보다 빛났던 것은 1959년에 처음 만들어진 '크리스챤아카데미'라는 개신교 성향의 운동단체였다. 이들은 사회 참여적인 기독교 음악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해외의 저항음악들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불씨를 지키고 지피는 데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이들은 <내일을 위한 노래>라는 제목의 노래책을 출판, 판매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80년대 이후 활발하게 펼쳐진 한국 노래운동의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세계 절반은 나>, <오! 자유> 같은 노래들이 번안되고 애창되었다.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이라는 가사로 애창되는 <활짝 웃어요> 같은 노래도 이 과정에서 함께 번안, 전파되었다. 여담이지만 88올림픽 때 코리아나가 부른 <Hand in hand>를 <손에 손잡고>로 번안한 이는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해외 저항음악의 번안을 담당했던 핵심 인물이었다.
노래를 통해 민주주의를 갈망한 기독청년
광주 학살의 기억이 무겁게 내려 앉아있던 80년대에도 음악을 통한 개신교의 정치활동은 매우 두드러졌다. 명동성당으로 상징되는 천주교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했지만 음악에서만큼은 개신교의 활약이 작지 않았다. 특히 장로교, 감리교를 위시한 청년들의 행동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각기 ‘장청’, ‘감청’이라 약칭되었던 이들은 독자적인 노래운동 집단을 통해 음악을 만들고 녹음을 하여 기독교 사회운동의 당위성을 전파하였다.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이들의 목소리는 교회를 넘어 대학과 노동현장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이처럼 개신교의 참여정신과 그들의 음악은 오랜 세월동안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데 크게 일조해 왔다. 하지만 지금 현재 그들의 모습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강화된 선교활동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 추락, 교인의 감소가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다. 그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냉정한 지표다. 그래서 최근에 벌어진 개신교의 공개적이고 명시적인 사회 참여 선언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교회 자정을 위해서도 민주주의의 확산을 위해서도 나름 긍정적인 현상이다.
개신교에는 희망의 복음이 없다
문제는 요즘 세상에 개신교가 전파하는 희망의 노래가 전혀 없다는 것. 사람들이 개신교의 사회 참여 선언을 우려했던 이유다. 사회참여를 희망하는 개신교인들이 이러한 맥락을 꼭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원문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104
[金土日의 리트윗] 한국 민주주의 성숙에 일조했던 개신교…'희망의 노래'가 없다
개신교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최근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이 나라의 각종 정치적 현안에 대해 매우 과감하고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때론 위법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르고 있는데 역으로 그만큼의 부정적인 여론도 비등하다. 이들은 현재로서도 사회적으로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이 나라의 현직 대통령까지도 교인으로 거느리고 있지만,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듯 좀더 강력한 세력 규합에 나서는 중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내친 김에 정당 결성에까지 나서겠단다.
개신교가 정당을 결성한다고?
무작정 비판하거나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시대이든지 종교가 가장 주목받고 인정받는 때는 사회적 활동, 정치적 참여를 적절한 때에 열렬한 수준으로 수행하던 순간이니까 그렇다. 게다가 종교란 것이 근본적으로 가난한 자와 헐벗은 자를 위한 실천, 정의와 진리를 향한 행동에 그 존재론적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적극적인 사회적 발언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정치적 결사체를 구성하는 것도 나름 괜찮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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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국민운동본부가’29일 주최한 '3000대 교회 초청 기독교지도자 포럼’ 안내 포스터. |
종교는 역사적으로 때로는 억압적 체제의 발원지였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해방 운동의 강력한 동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함께 해온 기독교 역시 이러한 양면적 속성을 뚜렷이 지니고 있었고 굴곡 많았던 오랜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사회적 참여가 일구어낸 구체적 성과는 작지 않았다.
음악 영역은 최근 움직임이 활발한 개신교의 사회적 참여 전통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이 땅에 자리 잡은 100여 년 동안 음악을 이용해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으니까. 음악은 사회 계몽의 주요한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노래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널리 전파되었다. 천주교가 한국의 음악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선교에 나섰다면 개신교는 서양의 이질적인 음악적 전통을 직접 이식하는 방식을 택했고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만큼 음악적 파급효과도 상당했다.
구한말 애국 운동에 기여한 찬송가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대한제국 ‘공식’ 애국가(1902)가 제정되기 전에도 사회 곳곳에서는 이른바 ‘애국가’가 만들어지고 애창되었다. 조선사회에 드리운 제국주의 세력을 보며 나라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많은 애국가류의 노래들이 교회를 통해 만들어지고 전파되었다. 또한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애국가류의 노래는 찬송가의 선율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그 이후에도 애국가의 선율로 가장 유명했던 것은 <작별>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올드 랭 사인>이다. 이 노래는 원래 스코틀랜드의 민요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찬송가로 먼저 전파되었다. 지금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제목의 찬송가로 또 졸업식의 대표적인 송가로 애창되고 있다.
음악을 통한 개신교의 사회 참여는 발군의 음악인들을 탄생시켰다. 친일파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주옥같은 노래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수놓은 홍난파, 최근 한국 최고의 작곡가로 재조명되며 얼마 전 KBS에서 그의 일생을 다룬 프로그램 편성을 두고 커다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정율성 등 대표적인 한국의 음악인들이 모두 개신교를 통해 음악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다.
크리스챤아카데미, 노래운동의 산파
일제시대가 끝나도 만족할 만한 자유와 해방이 찾아오지 못했던 까닭에 음악을 통한 개신교의 사회 참여는 지속되었다. 유신시절의 폭압적 통치 하에서 어느 누구보다 빛났던 것은 1959년에 처음 만들어진 '크리스챤아카데미'라는 개신교 성향의 운동단체였다. 이들은 사회 참여적인 기독교 음악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해외의 저항음악들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불씨를 지키고 지피는 데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이들은 <내일을 위한 노래>라는 제목의 노래책을 출판, 판매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80년대 이후 활발하게 펼쳐진 한국 노래운동의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세계 절반은 나>, <오! 자유> 같은 노래들이 번안되고 애창되었다.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이라는 가사로 애창되는 <활짝 웃어요> 같은 노래도 이 과정에서 함께 번안, 전파되었다. 여담이지만 88올림픽 때 코리아나가 부른 <Hand in hand>를 <손에 손잡고>로 번안한 이는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해외 저항음악의 번안을 담당했던 핵심 인물이었다.
노래를 통해 민주주의를 갈망한 기독청년
광주 학살의 기억이 무겁게 내려 앉아있던 80년대에도 음악을 통한 개신교의 정치활동은 매우 두드러졌다. 명동성당으로 상징되는 천주교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했지만 음악에서만큼은 개신교의 활약이 작지 않았다. 특히 장로교, 감리교를 위시한 청년들의 행동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각기 ‘장청’, ‘감청’이라 약칭되었던 이들은 독자적인 노래운동 집단을 통해 음악을 만들고 녹음을 하여 기독교 사회운동의 당위성을 전파하였다.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이들의 목소리는 교회를 넘어 대학과 노동현장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이처럼 개신교의 참여정신과 그들의 음악은 오랜 세월동안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데 크게 일조해 왔다. 하지만 지금 현재 그들의 모습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강화된 선교활동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 추락, 교인의 감소가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다. 그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냉정한 지표다. 그래서 최근에 벌어진 개신교의 공개적이고 명시적인 사회 참여 선언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교회 자정을 위해서도 민주주의의 확산을 위해서도 나름 긍정적인 현상이다.
개신교에는 희망의 복음이 없다
문제는 요즘 세상에 개신교가 전파하는 희망의 노래가 전혀 없다는 것. 사람들이 개신교의 사회 참여 선언을 우려했던 이유다. 사회참여를 희망하는 개신교인들이 이러한 맥락을 꼭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원문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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